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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와 로베스피에르 독재

높푸른 하늘 2004. 9. 7. 13:56
마라의 암살

 

  산악파는 국민공회를 제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들 앞에 어려운 과제가 잇따라 출현하였다. 첫째로, 의석을 잃은 지롱드파 명사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으로 잠입하여 각지에서 반산악파의 음모를 계획하였으며, 왕당파와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 파리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는 전쟁에 의해 발생한 물자의 결핍과 식료품의 등귀가 두드러졌으며, 극좌 파괴분자가 활약하였다. 산악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농민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취하여, 봉건적 공과(貢課)의 무상폐지,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을 소토지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1793년 7월 13일 산악파의 핵심적 지도자인 마라가 자택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산악파도 권력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어 방종한 자유의 폐기로 정책전환을 하였다. 국민공회의 최고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안위원회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출마하여 입법,행정,통수의 지령본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인민의 이름에 의한 독재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공포정치

 

  1793년 8월에 군사정세는 재차 악화되어 북동 국경지대의 프랑스군이 각 전선에서 부득이 후퇴하게 되자, 국내의 위장 왕당파나 지롱드파는 활개를 펴고 활동을 획책하였으며, 도시의 식량위기도 급속히 증대하였다. 파리에서는 최고가격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귀족과 함께 매점상인, 악덕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고, 당통까지도 부당소득자의 오명이 씌워졌다.

 

  자코뱅당 좌파의 에베르는 9월 5일 시민을 동원해서 국민공회에 몰려가 혁명의 무제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반혁명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청하였다. 공안위원회는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의 혁명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93년 가을부터 다음해에 걸쳐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먼저 반혁명의 이름 아래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 명사들이 처형되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롤랑 부인도 같은 운명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처럼 약 1년 동안에 1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

 

  공안위원회의 총력전체는 정확히 성공을 거두어 1793년 말까지는 국내의 반항은 소탕되고 대외전쟁에서도 프랑스는 반격으로 나아갔으나, 산악파 내부에서는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코뱅 좌익의 에베르파를 보태어 우익 당통파와 로베스피에르파가 3파로 되어 대항하였다. 이들 중 에베르파는 94년 3월 파리의 식량사정 악화를 이용하여 시민을 동원해서 봉기를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이어 4월에는 당통파가 숙청되었다.

 

  로베스피에르파는 정권을 독점하기는 하였으나 인심을 얻지 못하여 겨우 3개월밖에 계속하지 못하였다. 공포정치하에서는 국민생활 자체가 동결되고, 모든 활력이 마비상태에 빠지는 반면, 관료통제가 새로운 퇴폐를 낳아 종전의 혁명가들도 권력의 남용자나 편승자로 바뀌어갔다. 로베스피에르를 미워하는 국민공회 의원은 그동안 암암리에 밀모를 진행시켜 7월 27일의 의회에서 그의 유죄를 선고하고, 다음날 그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