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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6세 처형과 지롱드파의 패배

높푸른 하늘 2004. 9. 7. 13:53
루이 16세의 처형

 

  양파의 대립은 특히 국왕의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파는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투표에서 패하여 마침내 산악파의 주도하에 국왕은 1793년 1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의 죽음은 지롱드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하의 프랑스에도 용이치 않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영국,네덜란드,에스파냐,나폴리,로마교황 등이 왕의 처형 사실을 알고 잇따라 참전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함께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방데현 등 서부 후진지대에서는 황당파의 반란까지 발발하였다.

 

지롱드파의 패배

 

  지롱드파는 더욱 더 초조한 빛을 나타냈다. 1793년 3월 말에는 자파(自派)가 임명한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고, 의회에서도 사사건건 로베스피에르, 마라 등 산악파의 영수(領袖)에게 기선을 빼앗기는 형세가 되었다. 초조해진 그들은 국민공회 안에 12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 단속의 명목으로 파리 코뮌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5월 31일 지롱드파의 부당한 체포에 격분한 시민은 대거 공회를 포위하고 12인위원회의 폐지, 중앙혁명군의 징집, 귀족출신 장교의 퇴관, 반혁명 용의자의 체포, 노인과 불구자의 구제 등을 요구하였다.

 

  6월 2일에는 더욱 많은 시민들이 공회로 몰려들었다. 회의장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지롱드,산악 양파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장내로 뛰어들어 시민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지 않는 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결과 지롱드파는 간부당원 29명이 의석을 잃고 공회에서 약체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산악파는 독주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